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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명을 연마하는 창제행

상락아정 2019. 11. 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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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을 관함
나의 생명을 연마하는 창제행


사람은 자진해서 선행(善行)을 하는가 하면, 어떤 계기에 우연히 일어난

나쁜 생각으로 악행(惡行)을 저지르는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선과 악이 마음속에 함께 공존해 있기 때문이다.


성훈에 “선악일여<善惡一如=선과 악은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두가지 작용이며, 본래 그 체(體)는 불이(不二)라는 것>

”(어서 790쪽)라고 보여지고 있는 그대로다.


‘마(魔)가 끼었다’라고 할 때의 마도, 외부로부터 온다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 생명에 명복(冥伏)해 있던 무명(無明)·번뇌(煩惱)가 발동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성훈에는 “불교를 배운다고 할지라도 심성(心性)을 관(觀)하지 않는다면

결코 생사(生死)를 출리(出離)할 수 없느니라”(어서 383쪽)라고 있다.
불교를 수학(修學)하는 의의는 ‘심성’ 즉 생명을 관하는 것에 있다고 설하고 있다.


불법(佛法)을 수행한다고 해도, 자기의 생명을 바로 응시하며 연마하지 않으면

생사의 어둠을 극복하고 불도를 성취할 수는 없다.


그러면 내 생명을 바로 응시하며 반성하고 이것을 청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거울’에 비유해서 가르치고 있다.


“미혹에 붙잡힌 범부(凡夫)의 마음은, 마치 ‘닦지 않은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 것도 비치지 않고 더럽혀져 있는 것인데, 그 거울도 닦으면 번쩍번쩍

 빛나며 모든 것을 잘 비추는 ‘깨달음의 명경(明鏡)’으로 된다

”(어서 384쪽, 취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어서 384쪽)라고도 말씀하시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 비치지 않는 거울이나 그 거울을 닦아서 잘 비치게 된

거울이나 그 체(體)는 동일하다는 것. 그래서 잘 비치지 않는다고 해서

내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꿔치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범부의 생명을 버리고 부처의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기 내면의 불계(佛界)라고 하는 ‘존극(尊極)의 생명’을 믿고,

 내 생명을 닦는 오직 하나의 실천의 방법인 창제를 밤낮으로 실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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