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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거울

상락아정 2021. 5. 1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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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오늘은 거울을 통해 신심의 중요한 자세를

말씀 드리려 합니다.

 

거울은 불법상, 참으로 뜻이 여러 가지고 비유로도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우리의 신심에 관해서 간결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동경(銅鏡) 등은 사람의 모습을 비추지만 아직 마음은

비추지 못하느니라. 법화경은 사람의 모습을 비출 뿐만

아니라 마음도 비추느니라.

마음을 비출 뿐만 아니라 선업도 미래까지도 비추어

보심이 흐림이 없노라.”

(어서 1521) 거울 등은 사람의 모습은 비추지만

마음은 비추지 못한다.

 

법화경은 사람의 모습(색법)뿐 아니라 마음(심법)도 비춘다.

마음뿐 아니다. 과거의 업인(業因)도 미래도 흐림이 없이 모든 것을 비춘다.”

 

거울은 눈에 보이는 얼굴과 모습을 비춥니다.

불법의 거울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모습까지 비춥니다.

거울은 인간이 반사의 법칙 등 빛의 법칙을 응용해서

 

모습이 비치도록 연구한 지혜의 산물입니다.

어본존은 우주와 생명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실상을

바라보고 성불할 수 있게 한 부처의 지혜의 궁극입니다.

 

용모를 단정히 하려면 거울이 반드시 필요하듯 자신을

바라보고 인생을 응시해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생활을

누리려면 생명을 비추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일생성불초>에는 암경(闇鏡)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

되느니라.”(어서 384)고 씌어 있습니다.

 

뿌옇게 흐린 거울도 닦으면 옥과 같이 빛나는 것처럼 미혹의

생명도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묘법의 빛을 내는 명경이 된다.”는 뜻입니다.

 

매우 유명한 구절인데 이 어서도 이러한 거울 연마

전통을 배경으로 쓰셨습니다.

어쨌든 어떠한 사람의 생명도 본디 반짝반짝 빛나는 명경입니다.

그 명경을 닦느냐 마느냐의 차이입니다. 닦으면

부처, 뿌옇게 흐려 있으면 미혹된 범부입니다.

 

묘법을 부르는 일이 생명을 닦는 일이며 우리는 몸소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묘법을 가르쳐 그 생명의 거울을 빛내도록 노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명의 거울을 닦는 장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얼굴은 잘 닦으면서 생명은 좀처럼 닦지

않습니다.얼굴의 점이나 옷차림 기미는 신경을 쓰면서

생명의 옷차림이나 기미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얼굴은 화장할 수 있어도 생명의 얼굴은 화장으로 감출수

없습니다. 속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인과의 이법은 엄연합니다.

불법에서는 음덕양보(陰德陽報, 보이지 않는 선행이 보이는

행복의 결과로 나타난다)라고 설합니다. 불법의 세계에서는 전혀 헛됨이 없고,

겉과 속이 다를수도 없고 겉을 꾸며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선악의 인과를 새긴 생명의 얼굴은 어느 정도 표면에,

()’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여시상이지요(뇨제쇼)

 

영국에는 얼굴은 혼의 거울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혼의 얼굴을 이름답게 닦기 위해서는 거울을 보고 얼굴을 단정히 하듯

생명을 비추는 거울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관심어본존입니다.

 

<관심본존초>에는 관심에 대해 명경을 향할 때 비로소 자구(自具)

육근(六根)을 보는 것과 같다.”(어서 240) 명경을 향할 때 비로소

자신의 안(, ), (, ), (, ), (, ), (, ), (, 마음)를 볼 수

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관심은 자신의 마음(생명)’에 십계를, 특히 불계를 보는 일입니다.

그를 위해 대성인이 인류에게 관심어본존을 주셨습니다.

 

어본존이 바로 우주 전체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명경 중의 명경입니다.

 

이 어본존에게 기원할 때, 우리 생명의 본디 모습

(실상)을 보고 불계를 용현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신심의 일념은 그대로 어본존에 비치어 대우주에

반영됩니다. 이것이 일념삼천의 법리입니다.

어본존에게 기원하는 장엄한 신심은 그대로 자신이라는 보탑을 장엄하게 장식합니다.

어본존에게 기원하면 바로 우주의 모든 불보살과 제천이 우리를 수호합니다.

비방하거나 의심하면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어쨌든 마음이 중요합니다. 신심의 일념은 미묘합니다. 그래서 묘법이라 합니다.

 

예컨대 때로는 근행과 광포 활동을 하는 것이 귀찮고

싫다.’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 마음은 거울처럼 그대로 대우주에 비칩니다. 말하자면 제천도

아 수호하기 싫다.’ 하고 생각합니다. 이래서는 제천선신(諸天善神)

참된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일이든 또 복운을 쌓자.’ 하고 기꺼이

행동하면 제천도 환희하며 기운차게 움직입니다.

안할거면 몰라도 어차피 행동할 거라면 그쪽이 이득이다.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일념으로 불도수행을 하면 그렇게 불신하거나

푸념하는 마음이 공덕을 없애고

맙니다. 그 결과 당연히 공덕을 자각하지 못하고

역시 시간 낭비였다.’ 하고 이상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정말일까하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신앙해도 그 약한

일념이 우주의 거울에 비치어 애매한 결과가 나옵니다.

강한 확신을 지니면 복운은 무한대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미묘하고 엄연한 신심의 마음을 자신이

조절하면서 상쾌하게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인생도 경애도 드넓게 열립니다.

 

분명 모든 생활이 공덕으로 기득 넘칠 것입니다.

일념의 미묘함을 터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신심의 요체이며 거기에

일생성불의 열쇠가 있다고 할수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거울이

나쁘다고 화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행, 불행은 모두 자기 생명의 인과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신심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거울이 없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거울이 귀중품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도성에서 돌아온 남편이 아내에게 거울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처음 거울을 본 아내는 거울에 비친 여인의 모습에 이 사람은 누구인가요.

결국 도성에서 여인을

데리고 왔군요.” 하며 큰 싸움이 났습니다. 이것은

유명한 희극 중 하나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일념, 인과)에 비친 그림자임이 분명한데도 인생의 여러 가지 현상을 보고

전생에 무슨죄를 지었길개

왜 나만 그러냐 복도 지지리도 없다.

나는 모른다!’ 하고 화를 내거나 한탄하거나 합니다.

 

불법이라는 생명의 거울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생명현상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모르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회현상의 본질도 간파할 수 없습니다.

가정도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불공평 하다고 생각하고 남탓만 하고 원망만

합니다. 오늘 부터는 어본존님의 명경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을 들여다보고 열심히 갈고 닦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즐겁고 유익한 좌담회를 만들어 주신

00지부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며

건강에 주의를 부탁드리면서 여기서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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