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켄종의 실체를 말한다

천마 종문의 실체

상락아정 2020. 1. 10.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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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흑의 종문 700년 역사
본 장에서는, 니치렌대성인이 입멸하신 1282년부터 21세기

현재까지  니치렌불법의 7백여 년 역사를 통찰해 본다.
 

 

일련종 미노부파 40개 분파의 총본산인 구온사


미노부파(일련종)의 출현  (1283년)
창가학회가 출현하기 전까지, 세상 사람들은 남묘호렌게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하면  미노부(일련종)를 떠올렸다.
20세기 초까지 6백 년 이상, 남묘호렌게쿄 제목을 부르는

신앙인 중 무려 90%는 항상 미노부파 신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닛코 상인 문류는 10% 이하에 불과했었다.
 
1) 오노승
니치렌대성인은 입멸하기 5일전, 육노승을 본제자로 임명해,

훗날의 광선유포를 의탁하셨다.
그러나, 이 여섯 사람 중에 닛코 상안을 제외한 다섯 명이 모두

대성인을 배반했다.사제불이의 닛코 상인과 달리, 사악의 길로

향한 이 다섯 명을 오노승이라고 부른다.그리고,

오노승에 의해 생긴 종파들을 미노부파라고 통칭한다.

 


2) 오노승의 방법행위
① 오노승은 자신들이 니치렌대성인의 제자가 아니라,

 '천태의 제자'(천태사문)라며 대성인을 배신.
② 국가간효의 정신을 잊고, 국가을 위한 귀신 쫓기 기원을

자청하며, 권력에 영합.
③ 어본존을 시체와 함께 매장하고, "마음만이 중요하니라"라고

주장하며, 여우, 귀신, 석가불상 등을 제마음대로 본존으로 모심.

 

 

④ 어서를 불태우거나, 물에 불려 재생지로 사용.
⑤ 남묘호렌게쿄를 제멋대로 부르는 40여 개의

사종교 분파로 분열.
 
3) 오노승은 왜 대성인을 배반했을까
대성인이 입멸하신 시기에, 헤이노사에몬노조

요리쓰나가 막부를 장악하고 독재자로 군림했다.
대성인을 누구보다 증오했던 그는 악승 료칸과 함께

대성인의 문하들을 강력히 탄압했다.
스승에게 거듭되던 탄압이 제자 자신들에게 닥쳐오자,

오노승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노승은 난을 두려워했다. 두려움은 결국 '보신'을 낳았다.
오노승은 '보신'에 빠져, 스승을 배신하고 정법을 파괴했다.
 
4) '남묘호렌게쿄'를 훔쳐서 부르는 사람들
니치렌대성인에게는 사자왕의 용기가 있었다.
그것은 세계민중을 불행에서 구하려는 대자비이기도 했다.
대성인은 말법 광선유포에 홀로 일어선 진정한

법화경 행자였다.
 
여설수행(如說修行)의 법화경 행자에게는 삼류의 강적이

반드시 있다고 함을 아실지니라.  (어서 504쪽)
 
대성인이 걸으신 사명의 길을 잇기 위해서는 '불석신명'의

용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난을 두려워한

'보신'의 제자는 대성인의 문하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법을 파괴하는 부처의 적이 되었다.
니치렌대성인 불법 7백여 년의 역사를 돌아 보아도,

'사제불이'의 실천이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만 훔쳐서 부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광선유포의  흐름을 저해하는 역할을 해 왔다.
 

 오노승의 방법집단이 되었기에, 닛코 상인으로부터 시작된 후지
문류는 정법정의를 지켜야 할 사명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후지 종문의 역사는 올바른 실천을 잃고,

탁류에 휩쓸려 암흑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암흑의 후지 종문 역사 上 (창가학회 출현 이전의 역사)

(1333년~1928년)
 
1) 닛코 상인과 니치모쿠 상인의 서거 (1333년)
닛코 상인은 88세의 나이로 천화하기 일주일 전

닛코 유게치문을 남겼다.
니치렌대성인 불법을 지켜, 영원히 청류가 흐르게 하는 것은

오직 제자의 올바른 수행 외에는 없기에 그 규범을 26개조에

이르는 유계치문으로 남기신 것이다.
그리고, 닛코 상인이 서거하신 1333년 제3조 니치모쿠 상인도

생을 마감하셨다.
스승의 유지를 이어 천황에게 국가간효를 하기 위해 가던 도중에,

눈 덮인 설원 위에서 쓰려져 74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2) 제4대 니치도 시대부터 분열 시작(1333년)
종조 니치렌대성인의 어서, 개조 닛코 상인의 유계치문,

제3조 니치모쿠 상인의 순교의 정신을 근본으로 했다면,

종문은 청류의 흐름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4대 니치도 시대부터 종문의

암흑사가 시작되었다.
니치모쿠 상인이 눈길에서 순교하자, 니치모쿠 상인과

동행했던 니치고는 대석사로 돌아와 자신이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야심을 드러냈다.
한편, 스승의 국가간효 길을 수행하지 않았던 니치도는

권좌를 지키려고 니치고 무리에게 맞섰다.이렇게 하여,

후계자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다.
이는 무려 70년에 걸쳐 승려끼리 싸웠던 '대석사 토지

소유권 분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종문은 이 다툼으로 인해 니치도파와

니치고파로 갈라서게 된다.
대성인과 닛코 상인, 니치모쿠 상인으로 이어져 온

불석신명의 정신은 사라지고, 종문은 반으로 쪼개진다.
대석사는 니치도가 제4대 자리를 역임했고

대석사를 떠나간 무리들이 요법사를 세웠다.

요법사는 훗날 천태종 신앙으로 변했다.
 

 

 


 

3) 종문에 침투한 법주혈맥 사상 (1419년~1482년)
제9대 니치우 상인 시대에 변종 천태종 출신의

방법 승려 사쿄 닛쿄가 대석사에 들어왔다.
사쿄 닛쿄는 천태종의 법주혈맥사상을

대석사에 퍼트렸다.종문은 이때부터,

대석사에 원래 없었던 법주신앙에 물들어

주지승려를 '법주상인'이라고 부르게 된다. 
 

 법주절대론 탄생  당대의 법부를 만나 뵈을 때, 본불(本佛)을 만나는 것이니라.
(사쿄 닛쿄가 쓴 유취한집사(類聚翰集私) 중에서)

 

 

4) 어린 법주 시대 - "대성인의 능력을 가진 소년들"

(1482년~1573년)
사쿄 닛쿄의 영향으로 법주신앙이 시작된 종문은, 제12대부터

14대까지 어린아이들을 법주를 세웠다.
 
제12대 닛친 - 열 살에 등좌
제13대 니치인 - 열 네 살에 등좌
제14대 닛슈 - 닛슈는 신찰을 숭배하는 진구사 출신으로,

열 세 살 때 데려와 법주자리에 앉힘.
 
인재난에 허덕이던 종문은 이 어린아이들이 대성인의 위대한

신통력을 가졌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 근거로 사쿄 닛쿄가 주장한 법주절대론을 내세웠다.
 

 * 어린이 법주를지켜 준 법주절대론
당대의 법주에게 본존의 체(體)가 있으며, 이 법주를 삼가 만나는 것은, 니치렌대성인을 대신하여 태어나셨으므로, 생신(生身)의 대성인을 만나는 것이다.

(후지종학요집 제2권에 수록된 사쿄 닛쿄의 법주절대론)

 

 

 

5) 타종파 법주 시대 (1596년~1692년)
제15대 닛쇼부터 제23대 닛케이까지 무려 96년간은

타종파 승려들이 법주가 된 이상한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종문을 지배했던 법주들은 모두 신비로운

법주혈맥을 주장하는 천태문류 출신이었다.
이로 인해, 니치렌대성인 불법은 더욱더 법주신앙으로

변질되었다.
타종파 법주 시대 동안, 제17대 닛케이는 석가불상을

조립해 본존으로 모시는 등 방법행위가 계속되었으나,

법주절대론을 그들의 위치를 지키는 근거가 됐다.
 

 

 


6) 단가제도 시행(1641년~1867년)
절복 중단 --> 장례식 종교로 변화
종문이 절복을 중단하고, 다른 일본 불교들과 똑같이

장례식과 탑파공양에

매달리게 된 배경에는 단가제도가 있다.
일본 에도 시대(1603년~1867년)에 생겨난 단가제도는

민중을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서 국가가 만든 것이다.
 

 


<단가제도의 통제방식>
(1) 모든 사람이 무조건 절에 호적을 등록한다.
(2) 승려와 절에 순종하지 않으면, 호적이 말소된다.
(3) 호적이 말소되면, 기독교인으로 몰려 처형된다.
(4) 민중은 승려와 절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
(5) 막부는 불교를 이용해 민중을 구속했다.
 
 종문과 단가제도
종문은 1641년에 단가제도를 전격 수용했다.
단가제도의 특징을 알면, 오늘날 닛켄종 신앙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단가제도의 특징
단가제도 ① 계급의식-'승려가 위, 신도는 아래!'
단가제도로 인해, 매년 사람들은 소속 절에서 증명서를

발급받았다.증명서를 못 받으면, 취직을 하거나 다른

지역을 통행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호적이 말소되어 처형까지 당했다.
삶의 기반을 지키려면, 승려와 절에 복종해야 했다.

 

 

 

단가제도는 소소의 승려가 다수의 민중을 지배하는

철저한 계급의식을 낳았다.
종문 승려들이 가진 '승려가 위, 신도가 아래!'라는 차별의식.
그 뼛속 깊은 인간차별의 뿌리는 여기서 출발한다.
 
* 대성인의 정신
절대평등 사상
승려도, 일반신도도, 비구니도, 여인도 한 구절이라도

남에게 말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여래의 사자입니다.

(어서 1448쪽, 통해)
 

* 닛켄종의 정신
인간차별 사상
승려와 신도 사이에는 대성인 불법에 입각한 본래적인

차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학회파문을 앞두고 1991년 1월 12일에

종문 후지모토 총감이 학회에 보낸 문서 중에서)
 
단가제도 ② 절복 금지
단가제도 때문에 모든 사람은 소속 절이 정해져 있었다.
신앙을 바꾸는 것은, 소속 절을 바꾸고 호적까지

변경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단가제도는 이를 금지사항으로 정했다.
단가제도 하에서 절복은 위법행위였다.
종문이 무려 3백 50년에 걸쳐서 절복을 못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니치렌 대성인 불법교단은 말법시대 절복의 교단이다.
절복을 하지 않으면, 그 존재의 의미가 없다.
단가제도가 절복을 못하게 하는 악법이면, 교단의 운명을 걸고

국가간효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종문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했던 것이다.
 
단가제도 ③ 장례식은 승려가 주도해야 한다
단가제도로 모든 장례식은 승려의 도사로 진행했다.
승려는 고인의 후생선처, 성불에 대해 "후생선처가 되었군!"

 "아직 성불이 안 되었소!"하고 판단을 해줬다.
그리고 승려들은 고인의 기일을 전부 기록하여

과거장을 만들었다.
기일이 다가오면, 절에서는 신도들이 법요와 공양을

하러 오는지 전부 감시했다.

 

 

 

  

절에서 세운 장례식 방침과 회기법요 공양 등에

불응하는 신도는 호적이 말소되고 추방되었다.
그래서, 모든 일본인은 불교식 장례를 치러야만 했고, ]

이 때부터 일본 불교는 전형적인 장례식 종교가 되었다.
  
단가제도 ④ 공양지옥의 시작
장례식과 제례의식은 승려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승려들은 이를 독점한 채, 갖가지 명목으로 공양금을 수탈했다.
신도들 입장에서는 '부모와 선조, 고인을 위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일본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13주기'라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각 절은 이를 이용해 사망한 해부터 13년 동안

법요를 해주고, 돈을 받았다.
그런데 승려들은 공양수입을 늘리기 위해 이 기간을

연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30주기 혹은 40주기가 생겼고,나중에는 50주기까지

법요 기간이 늘어났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고인을 빌미로 삼아

유가족으로부터 수 십 년 동안 돈을 뜯은 것이다.
당시,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평생에 걸친 공양수탈이었다.

 

닛켄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탑파공양, 과거장,

계명수여, 회기법요, 피안회 등 대부분의 것들이 본래,

대성인 불법과 관계가 없었다.
하나같이 단가제도, 일본 장례식 불교의 것들이다.
 
7) 성승(聖僧)의 정신 파괴 (1871년 ~ 현재)
1870년, 메이지 신정부가 국가신도를 확립하기 위해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승려의 육식과 두발에

대한 질서가 무너지고  승려가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말(末)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처자를 가진

비구(比丘)도 남의  귀의(歸依)를 받고 (어서 936쪽)
 
대성인은 처자식을 가진 사람이 성승(聖僧)행세를 하는 것을

'말세의 현상'이라고 엄하게 비판했다.
성승이셨던 대성인과 닛코 상인은 출가한 제자들의

결혼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문은 제56대 니치오를 시작으로 출가승들이 일제히

결혼하기 시작했다.
처자식이 생긴 종문 승려들은 사유재산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보신의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성향은 훗날 닛켄종 중들의 공양금 쓸어

모으기로 이어진다.

 

8) 미노부파와 통합된 종문(1872년 ~ 1900년)
1868년 메이지 천황 시대가 시작되어,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신사를 숭배했다.
한 나라를 멸망시킨 군국주의의 망령이 고개를 든 것이다.
정부는 사상통합을 위해, 종교계를 유사한 종파끼리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 속에서 1872년, 미노부파와 종문의 통합도 추진됐다.
종문은 대석사와 승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국가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대성인과 닛코 상인을 배신하고, 국가의 남묘호렌게쿄

통합정책에 찬동했던 것이다.
미노부파도 종문도 남묘호렌게쿄를 부르기 때문에,

같은 종교로 간주되어 뒤섞여버린 것이다.
 

 

  
남묘호렌게쿄 종파는 본래 90% 이상이 미노부파 였기에,

종문은 이에 흡수통합 되는 형편이었다.
이후 1900년에 가까스로 독립했으나, 28년 동안 오노승의 무리와

한 패가 된  종문은 정사의 근본을 잃게 된다.
 

일련정종(日蓮正宗)이라는 이름을 얻은 과정
종문이 미노부에 흡수 통합됨(1872년 10월)
               ↓
남묘호렌게쿄 총본산이 승렬파와 일치파로 갈라져,

 종문은 승렬파가 됨(1874년 3월)
               ↓
승렬파가 4개 파로 쪼개질 때, 종문은 흥문파에 붙음

(1876년 2월)
                ↓
홍문파가 다시 8개 파로 분리 독립하면서, 종문도 독립

(1900년 2월)
※ 종문이 28년 만에 독립했기 때문에, 종문의 당시

법주 니치오는 외적으로 후지파 초대 법주라고 불렀다.
                ↓
종문은 '일련정종'이라는 명칭을 1912년 6월에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9) 법주들의 혈맥전쟁(1922년~1928년)
법주혈맥이라는 특수한 사상을 신봉해온 종문은,

그 최고 권좌를 빼앗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거듭했다.
미노부파의 하수인 역할을 해오던 제57대 닛쇼는 갑자기

악성종양으로 죽음을 앞두게 되자, 급히 법주자리를

닛츄에게 넘기려 했다.
그런데 이때, 야심가인 아베 니치카이가 이를 차단했다.
이렇게 하여, 닛츄는 지키려는 법주파와 야심에 가득찬

니치카이 쿠데타파 사이에 이른바 혈맥전쟁이 시작됐다.
결국, 제58대 법주 닛츄는 니치카이파의 공격에 밀려

2년 만에 퇴좌했고, 종문은 차기 법주를 선거로 뽑게 된다.
그러나, 니치카이파와 닛츄파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다.
선거장소에 경찰이 개입하여 9명의 승려가 연행되었고,

양측은 맞고소를 거듭했다.
 

 
1920년대에 종문은 닛츄파와 니치카이파로 갈라져,
법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맥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2년 후 재개된 선거에서 드디어, 야심가 아베 니치카이가

선거조작으로 법주자리를 빼앗았다.
이후, 법주자리를 둘러싼 분쟁은 더욱 격해졌고, 최후에는

일본 문부성까지 개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성인의 정신을 잃고, 사원과 승려 등 형태만 남게 된 종문은

대성인이 남겨주신 대어본존과 어서 등을 간직한 불교

유적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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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후지 종문 역사 下 (창가학회 출현 이후) (1930년 ~ 1990년)
 

1) 종문의 군국주의 협력, 전쟁찬양(1939년 ~ 1945년)
일본 군부가 니치렌대성인의 어본존과 어서를 불경죄로

적발하자, 제62대 법주 스즈키 닛쿄와 종문은 동요했다.
권력탄압에 두려움을 느낀 종문은 스즈키 닛쿄 법주와

대석사를 보호하기 위해 대방법을 저질렀다.

 

 


종무원 원달사항 제2176호 (1941년 8월 22일)
근행 관념문 수정
-. 조좌 관념문 삭제
-. 삼가 황조천조태신, 황조진무천황 및 역대 천황 등

국가신도 예배형식 관념문 사용
 

■ 종무원 원달사항 제2177호 (1941년 8월 24일)
-. 그후 어서 간행을 금지한다
 

■ 일령정종 교학부 제8호(1941년 9월)
니치렌대성인이 말법의 부처라는 의미가 담긴 어문과

천조태신 및 정팔번은  작은 신에 불과하다는 내용 등

14개에 이르는 어문에 대해

불경죄를 걱정하여, 해당 어서 모두 삭제.

 

 

이에 모자라 스즈키 닛쿄 법주는 훈유 제29호를 전국 말사에

통달해 신찰수용을 지시하고,

"대일본제국군의 탄알 한 발 한 발이 적군을 쓰러트릴 수

있도록 기원합시다"

 (제62대 법주 스즈키 닛쿄)
라고 호소하며, 천황조 찬양과 태평양전쟁 승리를 위해

창제회를 거듭 개최했다.

종문은 법주와 대석사, 그리고 승려를 지키는 것이

정법을 유지하는 것으로

판단해 대성인의 불법정의를 모조리 파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회의 마키구치 초대회장과 도다 이사장을

불러들여 신찰을 받도록 지시했다.

 


2) 대석사 화재 (1945년 6월 17일)
일본이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멸망하기 직전.
1945년 6월 17일 그 동안 국가에 충성하고 영합하며

온갖 방법을 저질렀던

 '대석사'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인해 대석사 대방 객전 등 총 5백여 평이 화염

속에서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고 천황숭배와 신사참배, 어서 삭제에 앞장을 섰던

제62대 법주 스즈키 닛쿄도

불에 타 처참하게 죽었다.

 

 

 

 

3) 대석사 관광화 획책(1950년 ~ 1952년)
피폐해진 종문은 일본 패방 직후, 농지개혁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 대부분을 잃은

상태에서 공양금을 기부해 주는 사람도 없어,

재정파탄으로 몰리고 있었다.
종문은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대석사 관광지화를 위한

회의를 1950년 11월부터 개최했다.
대석사를 불교 유적으로 만들고 대성인의 어본존을

유물로 하여,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돈을 받아 모으는

계획이었다.

도다 회장은 경제적 원조가 없다면, 이 한심스러운

중들의 계획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가학회는 월례등산을 통한 경제적 원조를 시작하여,

종문을 파산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이로써 무참한 대석사 관광지화 계획도 백지화 됐다.

4) 오가사와라 지몬 사건 (1946년 ~ 1952년)
오가사와라 지몬은 소설 <인간혁명>에 가사하라

지코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는 닛켄의 어버지인 니치카이의 오른팔 역활를 해 주다가.

승려들의 혈맥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니치카이를 배신하고,

 화당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오가사와라는 1937년 신본불적론을 발표했다.
국가권력에 충성한 것이다.

<오가사와라 지몬의 신본불적론 요약>
① 천조대신이 근본이고 부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② 천조대신은 남묘호렌게쿄를 구현한 지존이시다.
③ 그것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분이 니치렌대성인이다.
④ 천조대신 보다 위에 있는 범천 제석은 제거해야 한다.
⑤ 어본존은 천조대신을 멸시하므로, 불경죄에 해당한다.

오가사와라는 자신과 정반대로 신찰을 거부하고,

국가간효를 단행한 마키구치 초대회장을 불경죄

용의자로 밀고해 옥사하게 만들었다.

 

 

1952년 창가학회 청년부들은 '너구리축제'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자, 천하의 악승이 처분도 받지

않고, 종문 내부에서 버젓이

활보하는 것에 분개했다.
분노한 청년부들은 오가사와라를 마키구치 회장의

묘 앞에 데려가서 사죄하게 만들었다.
종문은 이에 대해서, "승려와 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를 위배했다."며, 모든 책임을

도다 회장에게 돌렸다.

종문 임시종회 '너구리축제 사건' 관련 결의사항
도다 조세이 처단 의결, 3개 항목
도다 조세이로부터 사죄문을 받는다
도다 조세이를 대강두직에서 파면.
도다 조세이 등산 정지.

5) 창가학회의 진력(1952년 ~1991년)
1952년 학회가 대석사 관광지화를 막은 이래,

1991년 종문이 학회를 파문할 때까지

학회는 일관되게 외호를 해 주었다.
멸망해 가던 종문이 회생한 것은 전부 학회의

외호 덕분이었다.

가. 대석사 영지 86%를 학회가 기진

 

 

현재 대석사 소유지 대부분이 학회에서 기진한 것이다.

나. 700년 만에 재개된 광선유포의 절복전
아래의 데이터 처럼, 창가학회가 75만 세대

절복전을 일으키기 전까지, 오노승의 후예들인

미노부가 남묘호렌게쿄 신앙자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학회의 대절복전에 의해, 방법종단 미노부파는 상대적으로 쇠퇴했고

남묘호렌게쿄는 닛코 문류에 정의가 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만약, 학회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여우나 귀신을

본존으로 창제하는 종교를 만났을 것이다.

다. 학회에 대한 역대 상인들의 감사함 표명

"학회가 없었다면, 일련정종은 멸망했을 것"
만약, 도다 회장과 창가학회가 없었다면,

일련정종은 멸망했을 것입니다.
어본존께서 진정으로 빛을 본 것은 학회가

출현한 후부터입니다.

학회 덕분에 본존님의 진정한 힘이 나오게 된 것이

참으로 고마울 뿐입니다.

 

 

 

 


 

"종문은 학회의 대은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
창가학회에게 대은(大恩)을 입었다. 그 덕택에 총본산은

관광지가 되는 것을 면했다.

 학회 덕분에 대법(大法)은 청정하게 오늘날까지 왔다.

종문은 창가학회의 대은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
니치준 상인이 1961년 11월, 서거 직전 남긴 유언
 

 

 

 

 


"말법 광선유포를 실현하는 것은 학회"
영법구주(令法久注)를 사신홍법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계단의 대어본존을 수지하여

 절복을 하고 있는 것은 학회입니다.
모든 방법의 난을 파절하고, 육난구이를 몸으로

행하여 말법 광선유포를 실현하는 것은

학회입니다.

라. 종문의 학회 파문 ◇ 닛켄종의 출현 (1991년 ~ 현재)
1991년 11월 28일 종문의 가짜 법주 아베

닛켄과 하수인들은

광선유포에 진력해 온 학회를 파문했다.
유감스럽게도, 파문의 근본 원인은 '질투'였다.
(관련내용은 '제2장 천마의 소행 - C작전' 참고)

창가학회와 종문의 결별은 '세계광선유포를

실현하는 인간주의

종교'와 '편협한 일본 불교의 폐습을 고집하는

권위중의 종교'의 결별이었다.

6) 학회의 종문 외호에 대해
<질문>
* 학회는 부패한 종문을 왜 지켜 주었지요?
* 학회가 외호를 해 주고, 많은 공양을 해서 오히려,

종문이 더욱 타락한 것 아닌가요?

가. 승속화합의 이상
종문을 몰락의 위기에서 구한 것은 학회었다.
그리고, 학회가 외호를 시작한 1950년대에는

종문 내부에도,

일련정종의 본 모습을 찾으려는 승려들의

노력이 공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창가학회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는

승려가 많았다.
이 속에서 승려도 학회원도 승속화합의 단결로

광선유포의참된 화합승단을 부흥시키려는

 

이상향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학회는 종문 내부에 엄연히 존재하던 악류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격의 손을 쓰되, 닛코 문류 전체가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인내했던 것이다.

나. 착각에 빠진 승려들
학회원은 니치렌 대성인을 향해, 광선유포를

위해서 공양을 했다.
그런데, 이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중들이 등장했다.

게다가 종문이 학회의 도움으로 파산위기를

넘긴 1960년대 이후에 등장한 중들은 학회에 대한

감사함을 몰랐다. 학회의 헌신을 복종으로 여겼다.

다. 타락의 원인
학회는 대성인께 보은하고, 광선유포를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양을 했다.

 일본과 세계 각지에 지어진 대부분의 절을

학회가 기진한 것도

대성인의 염원대로 어본존을 더 많은 사람에게 유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당시까지 모든 어본존은 절에서 하부했기 때문이다.

학회의 공양은 모두 광선유포를 위한 것이었기에,

승려들의 생활이 호화스럽게 될 이유는

애처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종문 승려들이 이것을 착복한 것이 문제였다.

대성인께서 진정한 문하들로부터 받은 공양을 중들이

중간에서 가로챈다.
학회가 외호를 거듭할수록, 종문이 구제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진 근본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일련정종이 혈맥이 끊어진 단체라면,

20세기에 출현한

학회는 어디에 정통성을 물려 받았는가?"
이러한 생각 자체가 종교의 미망이 존재한다.
① 정통성을 물려받은 특별한 인간이

존재한다는것은  일본 천태종에서 탄생한

법주혈맥사상에 불과하다.
② 대성인 불법의 정통성은 후계의 행동으로 계승된다.
③ 학회는 독보적인 정통성 따위를 주장하는

단체가 아니라, 대성인의 가르침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며, 대성인의

염원을 몸으로 실현해 온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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