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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불이(因果不二)

상락아정 2019. 12. 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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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불이(因果不二)

인(因)으로부터 과(果)로 향하는 때의 엄숙한 법칙과, 그 법칙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서, 변혁시키고 향상시키기 위한 강한

원동력이 나타나고 있다.


因이란 범부, 果란 부처


인과불이는 천태대사(天台大師)가 나타낸 십묘(十妙)가운데

제4인 위묘(位妙)와, 제5인 삼법묘(三法妙)에 입각해서 세워진 것이다.

위(位)란, 깨달음을 얻기까지 묘법의 수행 단계이고,

삼법이란 그 실천에 있어 삼종(三種)의 궤도(軌道)이다.

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여섯 단계로 나누어져,

육즉(六卽)의 위를 세우는데, 크게 나누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고 있는 인위(因位)와, 불과(佛果)를 얻은 깨달음의

경지인 과위(果位)로 크게 둘로 나눈다.

이것이 인과불이의 인과라는 것이다. 즉 미혹(迷惑)한 범부(凡夫)의

경애가 인이고, 깨달음의 부처의 경애가 과이다.

이 인과에 공통하는 것이, 삼법이라는 생명 그 자체에 갖추어지는 구조이다.

인과불이란 고뇌에 허덕이는 범부도, 자재(自在)를 즐기는 부처도,

그 생명의 구조(構造) 본질(本質)은, 모두 같은 것이고,

그 작용(作用)이 다르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삼법이란, 생명의 본성(本性)으로서 갖추어지는 부처가 깨달은 진실,

그 진실을 각지하는 지혜, 지혜의 발휘를 돕고 완성시키는 실천,

 이 세가지를 말한다.

이같이 삼법은 생명에 갖추어지는 본성(本性)이 작용을 발휘하는

궤도이기 때문에, 각기 그것을 궤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다.
묘법을 타고 갈 수 있는 것으로 하여 이 생명에 본래 갖추어지는

궤도로부터 떠나지 않고 나아갈 수가 있다면, 인생이라는 여행길은

항상 즐겁고 안심으로 가득 차 행복하다.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여행 자체를

즐기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다.

묘법은 인의 실천도 즉, 과의 즐거움이기 때문에 인과불이이고,

묘법 인과의 위(位)를 ‘육즉`이라고 한다.

인생에는 희비가 번갈아 가며 여러가지의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고뇌는 고뇌로 직시하고, 안락은 마음껏 맛보고,

묘법을 근본으로 살아간다면 본래 가지고 있는 힘을 자유자재로

발휘해서 기쁨도 슬픔도 모두 인생을 물들여 가는 풍요로움으로 하여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경애가 된다.

그런데 사람은 젊음이라든가 명성에 자만하여 병(病)이나

가난에 빠지기 쉽다.

선(善)에서건 악(惡)에서건, 사물에 분동되어 탐내는 것이라든가,

노하는 것이라든가 어리석음 등 번뇌를 야기시켜서 묘법을 버리고

 궤도에서 벗어 날 경우 결국은 지옥과 같은 인생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생명에 갖추어지는 진실


묘법을 믿는다는 것은 ‘행복열차의 티켓(기차표)`를 갖고 있다는 의미다.

묘법이란, 우주 근원의 법이며 또한 자신 생명에 갖추어진 진실이다.

 따라서 항상 생명과 함께 존재하고, 결코 잃어버리는 일은 없다.

묘법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진실을 생각해내고, 눈을 뜬다는 것이다.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 부처이다.

니치렌 대성인은 <일생성불초(一生成佛抄)>에서, “생명에 갖추어지는

불가사의한 진실(중생본유의 묘리)을 깨달았을 때는 부처(佛)라고

이름하고, 미혹(迷惑)되어 있을 때는 범부라 이름한다”(

어서 384쪽, 통해)라고 하셨다.

묘법에 미혹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본래 부처와 같은 깨달음의

경애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깨달음의 경애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 무지가 다른 모든 미혹의 근원이다.

예를 들면, 행복열차의 차표를 그저 잘 챙겨놓기는 했는데

막상 어디 두었는지를 잊고 있어 분명히 어디엔가 있기는 있는데

이제는 가지고 있었던 일조차 잊어버리고 있는 상태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차장이 차표를 조사하면서 점점 다가오고 있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한이 지난 승차권이라든가

영화관람권을 내놓기도 하고, ‘나는 특별하니까 차표 따위는

필요 없다`라고 거짓말도 한다. 또는 열차에서 도망친다든가,

다른 차로 뛰어 옮겨탄다든가 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과 같다.

이제 문제를 인생으로 되돌려놓고 볼 때, 고난에 직면하고서도

 ‘아직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별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있다든가, ‘당장만 넘기면 나중은

어찌되건 상관없다`라고 속이려고 한다든가, 또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라고 갑자기 태도를 고쳐 강하게 나오기도 한다.

 나아가서는 직면(直面)하는 과제로 부터 도망치기 위해 한층

더 심각한 불행을 초래(招來)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 결과 매일매일 생활에 더욱 여러가지의 어려움이 생겨나

사막의 모래같이 무수한 고뇌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행복열차 차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잊고 있는
그 사람은

모르고 있지만 행복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실은 모두 친절하다.

열차표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지고 있을 텐데요`라며

잘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여행을 하면서 찾아봅시다`라고 격려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사람은 한숨 돌리고, 또 유쾌한

여행을 함께 계속하며 된다.

행복열차의 승무원이나 함께 타고 있는 승객은 자타(自他)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묘법을 믿고 모두에게 그 가르침을

넓히는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이다. 열차표를 생각해

내도록 한다는 것은 바로 홍교(弘敎)이다.

그리고 ‘한사람도 남김없이 행복의 경애로!`라는 마음으로

영원히 계속하는 여행이 광선유포(廣宣流布)인 것이다.
도다 제2대 회장은 읊었다.

“묘법(妙法)의 광포(廣布)의 여행길은 멀고 멀기만 하지만

함께 격려하며 함께 정복하자.”


인간은 행복하게 될 권리가 있다


법화경에서는 묘법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데, 그 믿음으로서

 ‘신해(信解)`라는 것이 종종 설해진다.

신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梵語)로 ‘아도힘구티`이고,

이것은 ‘바른 지향성(志向性)`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인간관(人間觀)에 입각해서 바른 목적관을 확립하는것,

그것이 묘법의 신(信)이다.

바른 인간관이란 ‘누구나가 본래부터 행복하게 될

권리가 있다`라는 것이다.

바른 목적관이란 ‘그렇기에 각기 인생을 유쾌하게 살아내기 위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전진을 계속하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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